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문단 편집) === 제9차 위그노 전쟁(1589~1598)과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치세 === [[앙리 3세]]의 암살 이후 [[발루아 왕조]]의 맥이 사실상 끊기자 나바르 왕 헨리케 3세가 사실상의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고, 이 때 프랑스와 [[나바라 왕국|나바르]]는 [[동군연합]]이 되었다.[* 덤으로 나바르 왕국에 복속되어 있었던 [[안도라]] 대공의 지위 및 대공령도 이때부터 프랑스 국왕이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 14세]]때 이르러 프랑스와 나바르는 아예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 한편 연합군 내에서 앙리 3세를 따르던 가톨릭 교도들이 위그노였던 앙리 4세를 져버리고 탈영하면서 앙리 4세 또한 잠시 뒤로 물러나야 했고, 몇 주일 뒤 노르망디의 '''아르크 성'''이 보이는 곳에서 마옌 공작 샤를 드 기즈와 싸웠으며, 1590년 3월 14일에는 '''이브리 전투'''에서 마옌 공작을 패퇴시켰다. 그 사이에 앙리 4세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숙부 샤를[* 놀랍게도 '''[[추기경]]'''이었다.]이 죽으면서 왕의 정통성은 견고해졌고, 가톨릭 동맹은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딸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내세우는 등 <살리카 법>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1591년 4월 10일에 '''샤르트르'''가 앙리 4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앙리 4세는 차츰 가톨릭 세력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1593~1594년쯤 되면 앙리 4세의 군대는 파리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샤르트르에 이어 '''누아용'''까지 점령했으나 '''루앙'''만큼은 점령되지 못하자 앙리 4세는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들이 묻히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 는 명언을 하고 가톨릭으로 원복[* '원복'은 원래 [[가톨릭]]이었다가 타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와 개종함을 말한다. 전술했지만 앙리 4세는 위그노로 자라긴 했어도 어릴 적에 태어나면서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았으므로, 원복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했다. 앙리 4세의 개종은 그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킬 정도로 국외의 신교도들에게 파격적이었으나 장기간의 종교 내전으로 고난을 겪은 [[프랑스인]]들은 환영한 조치였다. 이후 오를레앙과 리옹이 복종했고,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른 후, 3월 22일에 파리에 무혈입성했다.[* 이때 또 다른 유명한 명언으로 '''"짐은 공동묘지를 통치하고 싶지 않다."'''가 있다. 이 발언을 통해 가톨릭과 위그노 양대 세력이 저지른 병크에 지쳐있던 민중의 인심이 '''위그노가 아니라 앙리 4세'''에게 쏠리게 된다.] 이후 가톨릭 동맹 치하에 있던 여러 도시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했고, '''랑'''의 경우, 포위공격 끝에야 겨우 복종했으나 '''브르타뉴'''만큼은 앙리 4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저항했다. 결국 1595년 1월에 앙리 4세는 스페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6월 5일 부르고뉴의 '''풍텐프랑세즈 전투'''에서 스페인 기병대를 격퇴했으나 그 보복으로 스페인군은 '''캉브레'''와 '''칼레''', '''아르드르'''를 점령했다. 1595년 9월 17일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앙리 4세의 파문을 취소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스페인군은 프랑스령에서 떠나지 않았고, 앙리 4세는 6개월 동안 '''라페르'''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으나 1597년 3월에 스페인의 기습 공격으로 '''아미앵'''이 점령되면서 3월 11~12일 동안 스페인군에 의해 수도 파리가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앙리 4세는 기적적으로 병력을 재편성한 후 9월 19일에 아미앵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자신의 서자와의 결혼을 미끼로 브르타뉴 총독인 매르쿼르 공작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의 처남으로 이복누나였던 로렌의 루이즈의 결혼과 함께 프랑스로 와서 브르타뉴 총독이 되었지만 종교전쟁 당시 6촌 형인 로렌 드 기즈 공작 편에 섰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진외증손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외젠 드 사부아]]를 칼치니토 전투에서 패배시킨 프랑스의 명장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었다.]을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앙리 4세는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의 딸과 자신의 서자인 세자르 드 부르봉-방돔을 결혼시켰다. 그 결과 매르쿼르 공작 작위는 방돔 가문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방돔 가문이 1727년에 단절되자 이 작위도 단절되었다. 이후 콩티 가로 넘어가지만 1770년 콩티 공이 작위를 부르봉 왕실에 팔았고, 이후 샤를 10세의 작위로 만들어졌다. 1830년부터는 오를레앙 왕실로 가서 간간히 만들어지는 듯 하다.]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낭트]]에서 역사적인 '''<[[낭트 칙령]]>'''[* 후에 손자 [[루이 14세]]가 이를 무시하고 탄압을 재개하여 대부분의 위그노들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개종했으며, 결국엔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폐기해버린다. 다만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과는 달리 <낭트 칙령>의 폐기는 프랑스 국내에서 위그노의 씨를 말려버렸다는 선언에 가까웠다.]을 통해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5월 2일 스페인과 '''베르벵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기나긴 전쟁을 끝냈다.[* 다만 [[프랑수아 1세]]의 외손자로 프랑스 왕위를 노렸던 [[사보이아 공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의 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1601년 '''리옹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국의 [[살루초]] 합병을 인정하는 대신 오늘날 [[앵(프랑스)|앵 데파르트망]]에 해당하는 [[부르캉브레스|브레스]](Bresse)와 뷔제(Bugey) 지역을 양도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